PC 통신 입문
컴퓨터로 인해 전교 등수까지 들먹이며 칭찬받던 나는 성적이 점점 떨어져, 고등학교는 그리 좋은 곳을 가지 못했다.
공부보다는 모형항공기 대회, 과학상자, 라디오 조립, 과학반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교 대표로 공군참모총장배 모형항공기 대회에 고무동력기 부문은 해마다 내가 나가서 입상하기도 했다. 글라이더보다 직접 동력을 만들어야 하는 고무동력기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과학실에서 공부는 뒷전이고 대회 준비에만 매달려, 거의 하루에 1대씩 모형항공기를 뚝딱 만들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중학교는 전국 모형항공기 대회만큼은 강팀이었던 것 같다. 입상하면 공군사관생도들이 손수 만든 제공호 모형이 트로피로 주어졌는데, 그것들이 지금도 교장실 진열장 한켠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나를 어머니는 못마땅해 하셨고, 과학 선생님과 면담도 잦았다. 그래도 수학·과학만큼은 재미를 붙여 수학경시대회에 나갈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입학은 지옥 같은 곳이었다. 비평준화 지역이던 안양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나 같은 약자에게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의리가 있어, 곤경에 처한 나를 든든히 보호해 주었다.
트라이젬 88을 구매했던 그 매장은 고등학교 때도 계속 드나들었다. 항상 최신형 PC가 진열되어 있어, 개인용 컴퓨터 최신 트렌드를 익히기엔 그 가게만 한 곳이 없었다. 당시 매장에 있던 386 PC에는 제닉스(XENIX)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만든 유닉스 계열 운영체제였는데, 사장님은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그 가게에서 나는 처음으로 PC통신이란 것을 접했다. "오, 이걸로 사람들이랑 대화도 된다고요?" PC통신 초창기에 채팅을 하던 사람들은 지금과 달리 당대 최고 지식층이 많았다. 나는 완전히 신세계에 충격을 받아, 모뎀을 사기로 결심했다.
내 구형 XT에도 모뎀을 달 수 있을까. 가능했다. 300bps — 지금 생각하면 정말 기가 막힐 속도지만, 당시 학생인 나에게 모뎀 가격은 버스비도 아껴야 했던 처지에 매우 큰돈이었다. 나는 버스비를 삥땅 치려고 그 먼 거리를 자전거로 학교를 다니곤 했다.
가게에서 여름방학 동안 알바를 하면 안 되겠냐고 사장님과 담판을 짓고, 부모님 몰래 컴퓨터 조립 알바를 시작했다. 사장님은 삼보 공식 매장 외에 조립 컴퓨터 매장도 따로 운영하면서 대학에도 납품하고 계셨다. 컴퓨터 조립은 나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가게 뒤편 조립 공장에서 내가 직접 조립한 컴퓨터만 수십 대는 되었을 것이다.
그 알바를 하는 사이 90년대 초반에는 모뎀 속도가 1200bps급으로 대중화되었고, 나는 알바비로 결국 1200bps 모뎀을 손에 넣어 내 XT에 드디어 장착했다. 나는 하이텔 이전, 케텔(KETEL) 세대다. 하지만 정액 통신비 부담이 커서, 나는 주로 사설 BBS인 호롱불 네트워크를 즐겼다.
고2 겨울방학 때, 호롱불 네트워크 사설 모임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처음 나갔다. PC통신으로 만나본 첫 사람들은 죄다 대학생 형·누나들이었다. 그 자리에서 피노 누나라는, 명문대에 다니는 엄청난 미인을 봤다. 갑자기 청계천 상가에서 컴퓨터 팔고 조립하며 먹고사는 꿈보다 대학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 들었다.
하이텔 메뉴를 뒤지다 보면 인터넷으로 넘어가는 항목이 있었다. 고퍼(Gopher), 아키(Archie)... 텍스트로 전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게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그런데 쓸 때마다 돈이 나갔다. PC통신 요금 위에 인터넷 접속 요금이 또 붙는 이중 과금이었다. 모뎀 속도도 느려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면 이 인터넷을 빠른 전용선으로, 돈 한 푼 안 내고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소문이 PC통신 커뮤니티에 돌았다. 그 말 한마디가 나를 흔들었다. '그래, 대학 가자.'
그렇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그간 공부를 너무 안 해서 성적은 지방대도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국사·국민윤리·국어 — 이른바 '3국' 암기과목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터넷과 PC통신에 눈이 돌아가고 나서부터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PC통신 속에서 만난 명문대 누나들이 너무 멋있었던 것 같다. 성적은 급상승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물리·수학은 기본기를 닦아뒀던 덕에 거의 만점 수준으로 올랐다.
늦게 불 붙은 공부 끝에, 나는 원하던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점수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은 결과였다. 전산과도 끌렸지만, 나는 코딩보다 하드웨어 쪽에 더 애정이 있었다. 당시 '컴퓨터공학'의 개념은 전자공학과의 마이크로프로세서 과목 어딘가에 녹아 있던 시절이었다.
합격 소식에 놀라신 부모님은 당장 486 PC를 최고급 사양으로 입학 선물로 사주셨다. 인텔 486DX2-50, 250MB Conner HDD, RAM 8MB, Trident VGA, 삼성 14인치 컬러 모니터, 9600bps 모뎀. 당시로선 정말 엄청난 스펙이었다. 우리 집 몇 달치 생활비가 날아갔을 것이다. 참, 나는 부모님 속을 너무 많이 썩인 것 같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이놈의 컴퓨터 때문에 1학년 때 학사경고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ㅠㅠ
다음 화 예고: 국내 최초로 Linux를 접하게 된 계기
'IT > 내가 경험한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93년도 486 들이고 한 뻘짓 ㅋㅋㅋ (0) | 2026.06.12 |
|---|---|
| 32Bit 486: PC통신의 세계로 (0) | 2026.06.10 |
| 16Bit DOS: 16비트의 문이 열린 날 (0) | 2026.06.10 |
| 8Bit BASIC: 컴퓨터라는 세계를 처음 만난 날 (0) | 2026.06.09 |
| 시스템 엔지니어가 LLM을 만지며 깨달은 것 (1) | 2026.06.09 |